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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OKS

[43/1000] 쾌락독서 >> 삶은 언제나 책보다 크다

by 신난생강 202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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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 독서 문유석

쾌락독서 책표지

 

「쾌락독서」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고르고 나니 옆에 있던 이 책이 이상하게 눈에 크게 들어와서 잠시 고민하다가 함께 데려왔다. 예전에 「개인주의자 선언」을 끝까지 못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색으로 공략하는 예쁜 표지와 홍콩영화 같은 제목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다. 독서도 다른 모든 것과 똑같이 타이밍이다. 어느 순간에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아주 재미있는 책이 되기도, 좋은 책이 되기도, 별로인 책이 되기도 하는 거다. 어쨌든 이번엔 느긋한 순간에 제대로 걸렸다. 아주 재미있었다는 뜻이다. 

 

문유석 작가는 현직 판사라는 사실로 더 유명하다. 소설 「미스 함무라비」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는데 대본도 직접 집필했다고 한다.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라는 일상의 변명을 무력하게 만드는 다른 세계 사람이다. 이 책은 놀이로서의 독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독서를 꼭 무엇을 이루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그냥 놀이로서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무려 판사님이 얘기하시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놀이로만 소비하다가 언젠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읽었나 현타가 온 사람들은 열심히 기록을 하기에 바쁘고, 어떻게든 책으로 읽은 내용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 보려고 애써 보기도 하는데, 정작 놀이로 소비하는 게 뭐 어떠냐고 주장하시는 분은 그걸로 책을 쓴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밌어서 한 달음에 책을 읽어버렸다. 

 

내게도 책은 놀이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의 집에 쌓인 전집을 부러워하며 탐한 경험은 없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지만 활자중독은 아니다. 나는 책을 구경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인간관계처럼 책도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좋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는 것, 혹은 인터넷 서점이나 요즘은 밀리의 서재 같이 물성이 느껴지지 않아도 책을 보고 원하면 언제든 접근할 수 있다는 그 안도감을 좋아한다.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책부터 검색한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책부터 검색한다. 저자와 목차를 알아가고 이 책이 이런 걸 담고 있으니 읽고 싶다 싶으면 장바구니에 일단 담는다, 내가 다니는 동네 도서관과 우리 옆 동네 도서관에서도 검색한다, 밀리의 서재를 검색한다 그래서 찾아내는 즐거움, 어디에 있다는 발견, 그리고 읽는 즐거움 혹은 고통을 즐긴다. 세상 알고 싶은 건 많고 독서의 속도는 따라갈 수 없으니 장바구니와 내서재와 사진보관함에는 읽고 싶었던 책이 잔뜩 쌓여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책들은 이미 내게는 아는 책이고 거기에 나의 즐거움이 있는 것 같다. 책으로 노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논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없다는 것이다. 책을 쇼핑하는 데도 이 맥락은 적용이 된다. 그렇게 책과 친해지게 된 것 같고, 지금도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이 책 속에는 내가 책을 읽으면서 겪었던 경험들과 비슷한 내용이 많이 있었다. 나도 초등학생 때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독서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여름방학 때였는데 어쩐 일인지 내가 학교 대표로 거기엘 갔다. 우리 집에서 도서관은 꽤 멀리 있었는데 그 거리를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어서 꼬박꼬박 잘도 다녔다. 읽으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도 쓰고 토론 같은 것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이 나는 건 우리 조에 멀끔하게 생긴 남자애가 야한 책을 읽은 이야기를 자꾸 했었다는 것, 그때부터 성숙하고 멀끔하게 생긴 남자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한 때 하루키를 좋아했다. 하루키란 하루키는 닥치는대로 다 읽던 때가 있었는데, 나는 의외로 첫 하루키를 「상실의 시대」가 아닌 단편 「빵가게 재습격」을 통해서 만났다. 신혼부부는 새벽에 극심한 배고픔을 느끼는데 남편은 과거에 빵가게를 습격했던 이야기를 아내에게 해준다. 빵가게를 털러 갔는데 주인이 바그너의 음악을 다 들으면 빵을 마음껏 가져가도 된다고 하여 음악을 듣고 빵을 가져온 이야기다. 아내는 그때 빵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순순히 받아왔기 때문에 그때의 결핍이 지금의 배고픔을 만든 것이라며 다시 빵가게를 털어야 한다고 빵가게를 털기 위해 나선다. 하지만 한밤중에 열려있는 빵집이 있을 리 없다. 그들은 맥도널드를 털기로 한다. 뭐 그런 이야기였는데 읽는 동안 오묘하게 물음표와 느낌표가 찍혔고 아주 기가 막히게 신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하루키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나도 저자가 생각한 것처럼 양사나이고 뭐고 이게 도대체 뭔지 모르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서 이게 왜 좋을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떠올렸던 이유가 그 책을 읽는 동안 이상하게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세상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이 드는데 그게 참 좋다는 것이었다. 추억의 시드니 셸던이나 순정만화 등 다른 접점도 많았지만, 하루키에 대한 이 비슷한 구절을 이 책에서 만났을 때가 가장 반가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좋아했다. 

 

 

책 속에 아직 내가 읽어보지 못한 위화, 스티븐 핑거의 세계는 내 장바구니에 조심스레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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