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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by 신난생강 202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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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이 지난 여행의 기록들은 사실 여행 그 자체보다는 여행을 하며 안쪽에 축적된 것들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게으른 날들이다. 한 달 전쯤 이 책을 읽은 후에 본문의 저 한 줄을 블로그에 적어두고는 지금까지 미루고 또 미뤘다. 다음 읽고 있는 책도 더디 읽던 터라 독후감 같은 건 거의 잊은 상태였다. 일상이 무너진 것이라고 해야 할지, 일상이 바빠진 것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조바심 나고 무기력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긴 여행을 한 달 앞둔 날이다. 이게 핑계이지만 그냥 게으른 탓인 게 아닐까.

“어쩌다가 여행 에세이를 9년째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고백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2012년의 뉴욕 여행기부터 시작되는 묵직한 책이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을 좋아해서 한때 꼬박꼬박 챙겨 읽었는데 언제부터 게을러진 걸까. 그동안 김초엽 작가의 책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서 김초엽 작가를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신혼여행기를 읽을 때쯤 결혼을 하셨던가 생각해 보다가 갑자기 아, 이 책이 정세랑 작가의 책이고 내가 내내 김초엽 작가와 헷갈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토록 무심할 수 있다니. 대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뉴욕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유지혜 작가의 [쉬운 천국]에서 뉴욕을 보았고, 재밌게 보고 있는 유튜브 채널 [유랑쓰]에서 뉴욕을 보았다. 총기가 떨어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다르다는 건 알았다. 소설가의 여행기는 다른 누군가의 여행기와 달랐다. 작가가 내민 손을 잡고 따라 들어간 그의 세계는 훨씬 인간적이었고, 오밀조밀한 혼자 하는 프로젝트들이 영감을 주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흘리고 간 물건의 사진을 계속 찍어오고 있다던가 하는 것. 좋았던 것들을 툭툭 나열한 글을 보고 힌트를 얻어 여행 기록을 그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최근 일기를 따라 해보기도 했다. 한 문장으로 툭 던진 것과 다르게 주절주절 하고픈 말이 많았던 내 일기는 멈칫했지만 긴 여행 중에 해보고픈 나의 프로젝트들을 일단 야무지게 메모해 두었다.

나도 앞으로 ‘여행을 하면서 안쪽에 축적된 것들’을 잘 모아보려고 한다. 어떤 형태가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지구를 사랑하는 지구인으로서 자연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보고 싶고, 그 낯선 환경 속에서 무언가를 내 안에 쌓아보고 싶다. 그리고 지금껏 나도 모르게 모아 왔던 내 것들과 함께 딱 정리해두고 싶다. 집 정리를 하면서 흩어져 있던 독서노트를 발견하는 즉시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그것들이 지금 이 자리에 나를 놓아두었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쓸모없는 것은 가지 쳐내고 필요한 것들을 응축해 어디에 굴러도 깨지지 않을 단단한 돌이 되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남의 여행기를 읽으며 지독하게 내 생각만 해버린, 그래서 딱히 기록해 둘 것이 없는 책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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