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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그거 얼만가요?

[투기자본의 천국] 영화 블랙머니에서 시작된 질문

by 신난생강 2020.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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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스타 게이트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영화 블랙머니를 보는 순간 저게 론스타구나 하는 건 알 수 있었다. 세상 일은 참 복잡하고, 백만 원 단위의 월급을 받는 나를 포함한 보통의 사람들에게 몇 천억 달러, 몇 조 단위의 돈은 체감할 수 없다 보니 나와 상관없는 일인 듯 느껴지고 외자 유치니 투기자본이니 조금 듣다 보면 비현실감에 피로해진다. 그걸 이용해 투기자본과 거기에 결탁한 일부 사람들은 부실기업과 나랏돈을 눈먼 돈인 마냥 투자라는 이름으로 뻥 튀겨 나눠가졌다. 국가 부도 사태였던 IMF 당시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 잘 몰랐다. 이 책, 「투기자본의 천국」의 거의 처음에 나오는 론스타의 투자 구조도를 보고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자신이 없어졌다. 근데, 제일 투자를 잘한다는 사람들을 연구해보고 싶었고, 560 페이지의 노란 벽돌, 깨부셔보고 싶었다. 물론 그러라고 쓴 책도 아닐 것이고, 결론적으로 이들의 성공적인 투자의 이면은 온갖 불법으로 점철되어 있었을 뿐이다. 

 

투기자본의 천국
국내도서
저자 : 이정환
출판 : 인물과사상사 2018.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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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스타 게이트는 이 한 건의 문제가 아니었다. 1999년 뉴브리지캐피탈에 매각된 제일은행부터 잘못된 시작이었다. 제일은행이 부실 금융기관이라는 이유로 금융기관의 대주주가 될 자격이 없는 외국계 투자회사에 정부 소유의 은행을 헐값에 매각하고, 심지어 매각 이후에도 불리한 매각 옵션에 의해 6조 이상의 공적자금을 더 투입했다고 한다. 당시 제일은행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고, 경험이 없었던 정부 관료들의 무지로 인해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 결국 칼라일의 한미은행 인수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까지 외국계 펀드에게 핫한 투자의 장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론스타 게이트는 앞 전 두 은행의 경험을 통해 반성하고 배울 시간도 충분했고, 외환은행은 당장 투자금을 유치하지 못하면 망할 정도로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에서 또 다른 종류의 문제이다. 돈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법망을 피해나갈 방법들을 연구하고 이용했다. 여기까지 만이라면 이 투자를 문제 삼기 힘들겠지만, 투자가 성사되도록 하기 위한 로비를 통해 모피아와 결탁하여 안 될 일을 되게 만들었다는 것이 문제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데, 참 화가 난다. 

 

모피아라는 말은 재무부 출신 인사를 지칭하는 말로 재무부(MOF, Ministry of Finance)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이다. 재무부 출신의 인사들이 정계, 금융계 등으로 진출해 산하 기관들을 장악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주면서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여 생긴 말이다. 론스타 게이트는 론스타와 모피아의 합작이었다. 

 

재무부, 금융감독원, 금융감독위원회 모두 모피아들이 발담고 있는 기관이다. 애초에 금융기관을 인수할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는 론스타 펀드가 외환은행 대주주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외환은행 부실을 부풀리고, 구주주인 코메르츠방크와 한국은행, 수출입은행의 지분을 헐값에 팔게 하는 과정에 정부 고위 인사가 결탁한 흔적이 있다.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극적인 문제가 아니라, 길고 치밀한 여정이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그 사이에서 중간 다리 역할을 했고, 교묘하게 해석되고 짜맞춰진 법에 론스타는 헐값에 외환은행을 사들였다. 그렇다면 모피아는 무엇을 위해 론스타를 위해 일했겠는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대금 1조 3,833억 원 가운데 자기자본은 1,700억 원뿐이고 나머지 1조 2,130억 원은 투자자들의 자금인 것으로 나타났다. 투자자는 23명 가운데 15명이 달러가 아닌 원화로 입금한 사실이 드러났다. 매수명세서를 보면 2003년 10월 30일 한 투자자가 투자한 자금 1,000억 원은 환율 1150.7원으로 환산해 8,690만 3,623달러였다. 이 밖에도 1,400억 원 1명, 1,000억 원 1명, 520억 원 1명, 500억 원 6명, 450억 원 1명, 400억 원 2명, 390억 원 1명, 300억 원 1명, 100억 원 1명 등으로 모두 7,960억 원이 10억 원 단위로 원화로 입금되었다. 전체 투자 금액은 달러로 결정했는데, 원화로 입금을 할 수 있을까? 애초에 외화가 들어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가 말하는 부실 금융기관의 외자 유치는 외국의 투기자본과 검은 머리 외국인의 자금일 것이다. 수십 배의 투자 수익이 확실한 재테크를 위해 자금의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사모펀드를 이용하고, 그 펀드를 위해 일한 누군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음모론일까? 

이 책에서는 수 십명의 실명이 등장한다. 톨스토이를 읽을 때처럼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두고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별하다가 나중에는 그 모든 게 의미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고, 론스타는 외환은행 매각 건으로 먹튀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어마어마한 수익률을 올리며 매각에 성공했고, 이후 안 되는 걸 되게 만들어서 돈을 쥐어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5조 원의 ISD 소송을 걸었다. 불합리한 이유로 외환은행 매각을 지연시켜 손해를 입었고,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을 부과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 소송은 8년째, 여전히 진행 중이다. 

 

참 돈을 버는 방법은 갖가지다. 제4장 주주 자본주의와 게임의 법칙을 보면 우리나라가 어떤 식으로 투기자본에 당했는지를 보여준다. 외국 투기자본은 홀로 그런 일을 벌이기 힘들다. 국내에 협력 세력이 항상 있었고, 그 거대한 이너서클은 못할 일이 없었다. 현실은 영화나 소설보다 더 은밀하고 치밀하고 스펙타클했다. 읽는 내내 화가 나긴 하는데, 재밌어서 쭉 읽어버렸다. 그리고 이들은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었다. 그래서 기자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사건을 시작부터 끝까지 기록하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책을 냈다는 작가님을 존경하게 됐다. 

 

이 두꺼운 책을 사건과 연관이 전혀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소설 읽듯 읽고서 세세한 사건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예 몰랐던 사건을 들여다보고, 흐름을 파악하고, 무엇이 문제였고 나쁜 것인지 알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남아 있는 기록은 소중한 것이다. 론스타 게이트가 언론에서 말하는 타이틀처럼 외국 자본의 먹튀인 줄로만 알았던 나의 눈을 뜨게 해 준 노란 벽돌 책. <블랙머니> 영화를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지하는 레이더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 든다. 아, 이 책이 읽기 부담스러운 분이라면 <블랙머니>라도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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