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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그거 얼만가요?

스스로 자라기

by 신난생강 2020.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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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불면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데, 우리 지역 초등학생의 코로나 19 확진으로 비상근무를 하게 되어 지난 토요일에 약 처방을 못 받았다. 그래서 이번 주 내내 수면제 없이 잠을 자고 있는데 자꾸 선명한 꿈을 꾼다.

 

시작은 도토리묵 할머니였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난데없는 대형마트가 있었다. 마트 안에 도토리묵을 파는 할머니가 있어 나는 도토리묵 한 모를 사고 싶었다. 그런데 도토리묵 할머니는 방금 했다며 먹어보라고 전이 두 개 담긴 접시를 내미셨다. 하나는 크고 예쁜 초록색의 전이어서 먹음직스러웠고, 하나는 만두가 반으로 쪼개진 모양의 작은 전이었다. 꿈속의 나는 초록색이 먹고 싶었지만, 얻어 먹는건데 큰 것을 집기 난처해서 작은 걸 하나 집었다. 그랬더니 도토리묵 할머니는 따뜻한 표정으로 초록색 전이 담긴 접시를 내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아가, 뭘 고를 땐 크고 좋은 걸로 골라라.”

하루종일 도토리묵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지금껏 어떤 어른도 나에게 그런 따뜻한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 앞으로는 크고 좋은 걸 골라야지.

 

다음 날은 어릴 때 살던 집이 나왔다. 연립주택의 B302. 실제로 주변에 호화로운 아파트가 들어서고 개발되었지만 우리 집 주변만 덩그러니 재개발되지 못하고 남아 있다. 꿈에서 나는 301호와 302호를 통째로 사서 3층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통유리로 벽면을 마감하면 주변의 초록과 잘 어울려 뭘 해도 되겠다, 옥상도 이용할 수 있겠지, 흐뭇해하며 옛집을 둘러보고 있었다. 꿈에서 깨고 이건 무슨 꿈일까 하며 직방앱을 켜 집을 검색했더니 시세가 어마어마하게 올라서 한 층을 통째로 사는 것은커녕 302호 옛집을 되사는 것도 어려워보였다. 그날 오후에 우연히 KBS 부동산 밀착 다큐 1,2편을 보았다. 1편은 2007, 2편은 2017년에 제작되었는데 일본의 버블 붕괴와 빈집 문제를 다룬 흥미로운 다큐였다. 집값이 폭락하여 이제 한화로 1천만 원 대에 시세가 형성되어도 팔리지 않는 도쿄 외곽 신도시의 맨션을 보면서, 옛날에 살던 우리집이 정상적이라면 저런 싼 가격의 집이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 지금의 부동산 가격이 뭔가 비정상적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다음 날은 꿈에서 경제 공부를 해야 했다. 요즘 경제학 책을 읽으며 기본부터 공부하고 있는데 꿈에서도 했다. 경제에 대한 공부를 누군가에게 배우다가 혼나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강렬했다. “자꾸 변명하고 핑계를 댈 생각을 하지 말고 힘들어도 계속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해야 뭐라도 되지.더 배워야 할 내용이 남아 있었는데, 거기서 잠을 깨버렸다. 그리고 아침까지 잠을 설쳤다.

어젯밤 누워서 공부해야 하는데 오늘은 도저히 못하겠네, 생각하면서 요며칠 꾸는 꿈은 다음 날에 대한 예지몽인가 하며 웃어버렸다. 핑계 대지 말고 공부를 해야 했는데 어제는 결국 공부도 안 했고, 글쓰기도 안 했다. 꿈속의 날 선 목소리만 생각하며 죄책감의 밤을 보냈다.

 

아마도 꿈속의 메세지는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 무엇을 골라야 할 때는 나의 경제적 처지를 살피고, 남의 눈치를 살피는 대신 제일 크고 좋은 것을 고르라는 내면의 목소리. 요즘 나는 가격표를 먼저 살피는 것을 덜 하는 편이지만, ‘가난의 그림자는 문득 내 뒤에 서 있더라.

내 집에 대한 강박이 꿈에서 보인 것 같다. 302호의 집은 우리 부모님의 첫 내 집이었다. 아마도 당시 투자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면 부모님은 새집이라는 이유로 그 집을 고르지 않았을 거다. 하필 부동산 버블에 관한 다큐를 보게 된 것도, 직방으로 옛집의 시세를 찾아보게 된 것도, 이미 고가의 소비재가 되어버린 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할 게 아니라 투자 공부를 해야 한다는 내면의 압박감이지 않을까. 경제 공부의 목소리도 마찬가지. 이렇게 기본부터 해서 도대체 언제 투자에 대한 것을 공부하나 하는 조급함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난데없던 꿈이 참 투명하게 나를 반영했다. 더 성장하고 싶은 나의 욕망이 꿈에서도 나를 옥죄고 있으니 피곤할 수밖에.

 

그렇지만 꿈속의 목소리처럼 변명하고 핑계 대지 말고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한다. 쑥쑥 더 자라고 싶다. 이젠 스스로 나를 키우는 시간이다. 좋은 것을 골라서 당근으로 주고, 때로는 채찍질을 해가며 스스로 좋은 어른으로 자라야 한다. 고무적인 사실은, 얼마 전 일반검진에서 측정한 키가 167.7cm였다는 것. 항상 반올림해서 167cm라고 했었는데, 실제로 나는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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