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복, 그거 얼만가요?

[돌이킬 수 있는] "무사해서 다행이예요"

by 신난생강 2021. 1. 17.
반응형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에게 내 입장에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게 폭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도대체 뭐가 다행이냐고 따져 묻고 싶은 상황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도 그랬다. 내가 안 괜찮은데 도대체 뭐가 그만하길 다행이란 말인가. 그래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타인에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참 불쑥불쑥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버리는 통에 말해놓고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될 때가 있다. 사실 오늘도 아끼는 동생과 통화를 하다가 "다행이다"라고 말해버리고 나서, 그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어 얼버무렸기 때문에 책을 읽다 마주친 저 말에 나도 마음이 흔들렸다. 다행인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어느 구절에선 이렇게 말한다. 무사하긴 하지만 다행인 건 아니라고.

 

 

돌이킬 수 있는
국내도서
저자 : 문목하
출판 : 아작 2018.12.05
상세보기

 씽크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건물이 붕괴하는 것 같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큰 사고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또 다르다. 이 이야기는 SF이고, 초능력을 얻게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서도 굳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경계 짓고 편 나누고 싶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이 있고, 경계심이 많은 사람,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얘기하면 그냥 일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나에게 그들의 초능력 같은 게 특별히 이상한 능력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그 경계 언저리의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의 세계는 내가 속속들이 알 수 없다. 함부로 내 경험에 비추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선을 넘지 말아야 할 때, 그 선을 지킬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고,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용기 내어 연대해 나가야 한다.

망가진 세상은 소설속에 자주 등장하지만, 상상만큼 충분히 망가진 현실에서 살다 보니 이제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도 느낀 건데 그런 망가진 세상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건 용기 있는 “젊은 여자”일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한다. 아저씨들이 망친 서사를 지루하도록 많이 봐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 젊고 날 선 순수한 시선과 마음, 용기, 연대, 정의감 같은 건 우두머리 남자를 떠올렸을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씽크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희망을 발견한 지점도 살아남기 위해 죄책감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무자비한 조직의 보스 최주상에게서 흔한 아재의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여자 위에 군림하려는, 혹은 성적 대상으로 희롱하는 흔한 이야기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다. 재난과 전쟁 속에, 아니 내가 발 딛고 선 현실계에서도 어디에나 흔하게 존재하는 여성의 희생이 없는 이야기를 읽다 보니 그 속에서 벌어지는 두 조직의 전쟁마저도 무해하게 느껴졌다. 건조한 캐릭터인 윤서리를 응원하면서 이야기의 타래를 푸는 긴 시간이 즐거웠다. 어떤 세상에 살든 내 세상을 얼마나 살만한 것으로 만드느냐는 내 의지에 달린 것이라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였다. 그냥 평화롭게 일상을 사는 것조차 포기하지 않는 어떤 목표를 향한 노력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고, 조금 쉽게 살고픈 마음에 채찍질을 당했다. 백 년쯤 노력할 각오를 해야 평화로움 그 근처 어디쯤 있을까 말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