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주택 유은실
"아, 순례 씨 개명하셨구나. 개명한 이름이 뭐예요?"
조 원장이 물었다.
"김순례."
순례 씨가 대답했다.
"엥? 개명한 이름이 김순례라고요?"
"응."
"원래 이름은?"
"김순례."
순례 씨는 개명을 했다. '순하고 예의 바르다'는 뜻의 순례(順禮)에서 순례자(巡禮者)에서 따온 순례(巡禮)로. 나머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라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서.
수림의 1군들은 참 대책이 없어 보고 있으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수림의 1군은 대학 시간강사인 아빠, 전업주부인 엄마, 고등학생인 미림이다. 아빠는 전임강사를 꿈꾸며 15수를 하고 있고, 엄마는 미림을 낳고 연달아 수림을 낳으며 심각한 산후우울증에 시달렸다. 외할아버지는 이런 딸의 가정을 경제적으로 도왔고, '원더 그랜디움'에 1군들이 살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수림은 엄마의 산후우울증 때문에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졌다. 외할아버지는 1군들에게 본인의 집을 내어주고 연인인 순례 씨의 집 순례 주택 201호에 세 들어 살고 있었고, 수림은 순례 씨와 외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잘 정제되어 순도 높은 안정적인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수림은 어리광으로 똘똘 뭉친 1군들과 달리 어른스럽게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는 이야기이다.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는 '원더 그랜디움'이라는 성과 달리 너그러운 순례 씨의 가치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놓고 남들에게 좋은 영향을 베풀며 돕고 살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쌓은 부가 오로지 나의 노동의 결과 만이 아니기 때문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벌지 않겠다는 절제에 기반한다는 것이 놀라움의 포인트이다. 욕심 내지 않는 어른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낯설어서 순례 씨가 어느 순간 신처럼 느껴졌다.
순례 씨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좋은 어른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는 없어도 순례 씨가 좋은 어른이라는 것은 느낄 수가 있었다. 순례 씨는 수림에게 좋은 어른이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주변에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좋은 어른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순례 씨에게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안정감에서 오는 여유가 있다. 1,000만 원이 넘지 않는 잔고를 유지하겠다고 하지만 꼬박꼬박 월세가 나오는 순례 주택이 있다. 물론 이 순례 주택이 있기까지 순례 씨의 노동이 기반이 되었다.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하고, 집을 사고, 집이 자산이 되어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세상이라면 모두가 순례 씨처럼 좋은 어른이 될까?
순례 주택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홍길동 씨 부부나 미용실 가족, 박사님, 영선 씨 모두 열심히 삶을 사는 사람들이지만 기반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거북 분식 사장님은 순례 주택에 들어오고 싶지만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리는 느낌이다. 집만 있다면 삶을 잘 꾸릴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그들은 작은 공동체가 되어 이웃을 돕고 질서 정연하게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 이웃으로 순례 씨도 함께 있을 뿐이다.
순례 씨는 캐나다에 이민 간 아들이 있지만 왕래가 거의 없고 연인 승갑 씨도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사실상 혼자다. 그렇지만 순례 씨의 삶은 충만한 느낌이 든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시도해보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채워나간다. 일손이 부족한 거북 분식에 가서 새벽에 김밥을 말아주기도 한다. 밥은 언제나 간단히 차려 먹는 것도 재미있었다. 대충 해결한다는 게 아니라 간단히 먹는다는 것이 평생 습관이라 혼자 먹는 밥상에 처량함이 없다. 넷플릭스를 보기 위해 스마트 티브이를 구입해 보고 싶었던 앤을 몇 번이나 정주행 하는 것도 좋았다. 찾기 쉬운 곳에 보험 등을 챙겨두고 만약을 대비해 이웃에게 이야기를 해 두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절제를 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과시하지 않으며 일상을 담담하게 사는 것.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셀프케어를 잘 하지만,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성심껏 돕는 것. 이것이 내가 순례 씨에게 배운 좋은 어른으로 사는 법이다.
누구나 읽기 쉬운 책이니 모두가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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