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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000]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by 신난생강 2022.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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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꽤 오랫동안 소설을 잘 읽지 못하는 상태였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지 않은 상태였나 보다.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건강한지 셈해보는 지표 중 하나다. 건강한 상태에서만 읽을 수 있으므로. 

오랫동안 그걸 잊고 살았고, 괜찮은 줄 알고 살았는데 드디어 소설을 읽고 나서야 내가 그동안 힘든 상태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소설책을 읽는 행위 그 자체라기보다는 작가에게 호기심이 생기고, 한 편을 읽고 나면 다른 읽고 싶은 소설들이 쌓여서 소설의 세계가 확장되어 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그걸 못하고, 정유정, 정세랑, 김혜진, 구병모 작가에 멈춰있었다. 외국소설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전에 멈췄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시작했다. 책을 좋아하는 친구가 예전에 이 책 내용이 뭔지 잘 모르겠다며 이 책을 읽어봤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는 이 책이 그냥 읽기 좋은 트렌디한 소설집이라고 생각했고, SF도, 단편소설도 선호하던 분야가 아니라 읽어 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니 책장을 펼쳐보지도 않고 반납을 했나 보다. 이번엔 매일 걸으면서 단편소설을 하나씩 들어볼까 하며 윌라에서 선택했다. 그동안 '김초엽'이라는 이름을 아주 많이 듣고, 보게 되어서 호기심이 생긴 상태였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7편의 이야기를 들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듣고 윌라로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걸으면서 듣다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싶어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 날은 운전하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들었다. 글자로 읽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느낌이었다. 

 

모든 이야기가 다 좋았고 새로운 작가의 세계에 푹 빠졌다. 이야기들이 주는 공통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이질적인 느낌의 SF가 아니라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고, 외계 생명체들은 인간들을 보살펴주려고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 따뜻했고, 무엇보다 여성 서사의 이야기들이 주는 무해한 느낌이 읽는 내내 편안한 공기층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나는 특히 <공생 가설>이라는 이야기가 좋았다. 류드밀라의 행성. 어느 예술가의 그림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예술가 사후에 발견된 행성이, 오래전 과거에 이미 사라진 그 행성이 작가 류드밀라가 그렸던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져 세상이 들썩인다. 같은 시기에 한국의 뇌해석연구소에서는 신생아들의 울음을 해석하던 중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신생아들이 아주 철학적인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게 류드밀라의 행성과 연결되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인간 밖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생각이 좋았다. 사람들이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그것들이 인간에게서 오는 게 아니라 외계에서 온 생명체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잘난 척하며 살고 있는 우리가 참 우스운 존재가 되고 마는데 그게 재밌었다. 얼굴 빨개져서 울고 있는 신생아들이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더 윤리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도 유쾌하지 않은가. 아기들이 엎드려뻗쳐 같은 동작들을 하는 게 앉고 싶은데 앉는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거라는 트윗을 보고 너무 귀여워서 한참을 웃었는데 어차피 잘 모르는 이들의 세계에 외계 생명체쯤 붙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다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들'이 떠날 때 기억을 가져가 버린 것처럼. 

 

김초엽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과학의 세상에 닿아 만들어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일상에 지쳤을 때 부담 없이 한 편씩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내 몫의 위로는 우주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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