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본 이후로 이 책은 내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아니 에르노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100 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소설이기 때문에 금세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 달이 지난 후에야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올 여름에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
도대체 내가 이 책을 몇 번을 읽었는데, 이 책의 첫 문장이 낯설었다.
나는 처음부터 「단순한 열정」을 좋아했다. 한창 아멜리 노통브를 좋았던 시절 아니 에르노도 알게 되었던가.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읽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나라 작가의 소설들은 빙빙 돌던 시절에 직설적으로 앞으로 나가던 그 힘이 좋았다. 대략 2000년대 초반이었다. 이 책의 첫인상도 그랬다.
<섹스 앤 더 시티>를 교과서보다 열심히 보던 시절이었다. 우린 이미 서양 언니들의 섹스 이야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위기의 주부들>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불륜 같은 건 작은 이벤트처럼 느껴지던 쿨함이 흘러넘치던 시대였다. 어쩔 줄 모르고 자기 위안과 섹스에 대한 상상으로 가득찬 동양 남자의 상스럽고 간지러운 이야기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이후로 이미 끝났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 아닐까.
어릴 땐 소설의 마지막 문단에 밑줄을 그었다. 불안하던 사랑이 모든 것을 좌우하던 시기였다.
이 글에 밑줄을 긋고 플래그를 붙인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이 책을 떠올리면 이 문장들이 바로 생각날 만큼 많이 보았으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 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의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어진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아마도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이 플래그를 붙였을 것이다. 이런 때도 있었구나 웃음이 났다. 이것도 불안한 사랑이었다.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한 여자의 집착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매 순간이 그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게 불안하기도 하지만 행복하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다. 뜨거운 주전자를 놓아 눌어붙어버린 아끼던 카펫에서도 사랑을 느꼈다. 이 남자를 잃을까 봐 남자에게 자신의 향기가 남지 않도록 조심하는 세심함도 보인다. 그것도 사랑인 거다. 항상 여기까지가 내가 읽었고 감정을 이입했던 부분이라면, 이번엔 남자가 보였다. 이 언니는 왜 이런 남자를 사랑했을까. 오로지 성욕만 보이는 남자일 뿐인데. 그리고 그렇게 소설을 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걸 읽으라고, 그 남자는 그것뿐이라고. 그렇지만 그토록 그 사랑은 눈이 멀었고 어리석었다고. 그럼에도 그게 사랑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랑 아니겠냐고. 누가 비난할 수 있겠냐고.
그렇지만 이 책을 쓰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자전적 소설을 써왔던 아니 에르노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작가의 소설들이 사랑받고 노벨상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이야기들을 하나의 담론으로 하나의 문학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한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파서 읽다 만 아니 에르노의 소설들을 다시 시작해 볼 기회가 생겼으니 이번엔 더 많은 작품들을 읽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매년 노벨상 후보에만 오르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그림자 위에 우뚝 선 아니 에르노가 너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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