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작가님을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피프티 피플」이다. 얼마나 이 책을 좋아하는가 하면,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답례품으로 이 책을 나눠주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 책을 좋아한다. 아쉽게도 아직 결혼 계획이 없지만.
휴머니즘이 식어버린 나에게 좋은 소설은 사람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 책은 무려 피프티 피플, 정확히 51명의 사람들 이야기이고 관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51인분의 인류애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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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드릴게요」는 SF 소설집이다. 장르소설은 내 취향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정세랑 작가님의 책은 ‘역시, 정세랑’이었다. 이따위 지구라면 지구 그냥 폭발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많았는데, 이 책에는 일단 이따위 지구를 리셋시키고 다시 시작해보자 뭐 이런 류의 지구에 대한 애정과 희망이 있었다. 알록달록한 표지만큼 알록달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언제나 알록달록한 삶을 꿈꿨지만 삶은 사람들을 점점 회색으로 만든다. 그래서 알록달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잃었던 생기를 되찾는 기분이 든다. 이 맛에 소설을 읽는데, 이 책은 언젠가 사진으로 본 모로코만큼 경이롭게 알록달록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나는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가장 먼저 읽었고 나머지를 차례로 읽었는데, 가장 좋았던 소설은 <리셋>이었고 <리틀 베이비블루 필>이 그다음으로 좋았다. 역시 일단 지구가 망해버리길 바라는 나의 사심이 잔뜩 드러나고 말았다.
외계에서 길이 75미터에서 200미터 사이, 직경은 8미터에서 20미터 사이로 보이는 지렁이들이 일회용 우주선을 타고 경주로 내려왔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왔다. 도시를 이루는 거의 모든 구성물을 먹고 소화해 분변토로 만드는데 특히 휘발성 유기 화합물을 좋아한다. 도시는 부드럽게 젖은 검은흙 속에 묻혀가고 있는데 젖은 흙에서는 백합 향이 난다. 죽은 거대 지렁이는 72시간 안에 분해된다.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 아닌가? 이 이야기를 읽다가 지렁이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생각해보면, 지렁이들이 내려오기 전에 끝나지 않은 게 신기하다. 우리는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무책임한 쓰레기만 끝없이 만들고 있었다. 100억에 가까워진 인구가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몸을 맡겼으니, 멸망은 어차피 멀지 않았었다. 모든 결정은 거대 자본에 방만히 맡긴 채 1년에 한 번씩 스마트폰을 바꾸고, 15분 동안 식사를 하기 위해 4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플라스틱 용기들을 쓰고, 매년 5천 마리의 오랑우탄을 죽여 가며 팜유로 가짜 초콜릿과 라면을 만들었다. 재활용은 자기기만이었다. 쓰레기를 나눠서 쌓았을 뿐, 실제 재활용률은 형편없었다. 그런 문명에 미래가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멸종이 끔찍했다. 멸종, 다음 멸종, 다다음 멸종, 사람들 눈에 귀여운 종이 완전히 사라지면 ‘아아아’ 탄식한 후 스티커 같은 것이나 만들었다. 사람들 눈에 못생기거나 보이지 않는 종이 죽는 것에는 개뿔 관심도 없었다. 잘못 가고 있었다. 잘못 가고 있다는 그 느낌이 언제나 은은한 구역감으로 있었다. 스스로 속한 종에 구역감을 느끼기는 했어도, 끝끝내 궤도를 수정하지 못했다.
거대 지렁이의 시대가 끝나고 세상이 리셋이 된 이후에는 인류가 지하로 들어가고 지상을 다른 종들에게 내어주었다. 종차별 금지법도 시행되어 반려동물도, 가축을 키워서 이용하거나 먹는 것도 금지되었고, 지상에서는 과일나무 아래 클로버를 키워 지렁이 농법으로 농사를 짓게 되는 것도 흥미롭다.
소설에서는 거대한 힘에 의해 지구가 완전히 리셋이 되고 나서야 인류는 반성하고 변했다. 잘못된 것을 느끼지만 궤도를 수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지금, 이 잘못된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이다. 환경문제를 SF 소설의 상상력으로 속시원하게 풀어내는 것이 좋았다. 자연으로 돌아가서 지렁이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나의 올리브 나무 아래 클로버와 지렁이가 자라는 것을 꿈꿔본다.
작가의 말에서 이 문장을 보았다.
"2020년은 SF 단편집을 내기에 완벽한 해가 아닌가 싶고, 세계는 더디게 더 많은 존재들을 존엄과 존중의 테두리 안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는다. 너무 늦지만 않으면 좋겠다."
정세랑이라는 이름에 광채가 빛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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