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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000] 페스트의 밤 >> 감염병과 힘

by 신난생강 2022.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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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의 밤 오르한 파묵


페스트 관련 책을 세 권을 동시에 읽었는데 그중에 가장 최근에 쓰인 책이 「페스트의 밤」이다. 오르한 파묵 작가가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직전 쓰기 시작해서 코로나의 시대에 발간이 되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배경은 1901년. 오스만 제국의 민게르섬.
찾아보니 이게 3차 페스트 대유행이던 중국발 유행 시기와 맞물리는데 책에서도 중국행 배에 올랐던 파키제 술탄과 누리 파샤가 페스트가 창궐한 민게르섬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보면 20세기 초에도 대대적인 페스트 유행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약 반 세기 동안 페스트가 중국, 인도 등지에서 유행하며 이들을 식민지로 둔 유럽까지 퍼졌다고 한다. 페스트는 종식된 감염병인 줄 알았는데 최근까지도 일부 지역에서는 발생을 하고 있었다. 페스트에 걸리면 단 몇 시간 안에 죽는 경우가 많아 병이 페스트라는 것을 밝히는 게 관건이고, 지금은 항생제가 있어서 페스트라는 게 확인이 되면 치료하면 된다고 하니 예전처럼 대유행이 발생하지는 않게 되었다.

죽음의 병이었던 페스트가 어떻게 한 민족의 역사를 만들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역사 소설이기도 하고, 죽음의 비밀을 밝히는 추리소설이기도 하다. 이 말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읽기가 만만치 않다는 말이고, 낯선 이름과 직함, 용어들에 익숙해지기까지 노력이 필요하다. 800쪽에 달하는 장대한 민게르 민족의 새 역사는 그렇게 피와 페스트로부터 어렵사리 시작되어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파키제 술탄은 이후 남편으로부터 어두운 아르카즈 뒷골목에서 길을 잃었던 그 형이상학적인 경험에 대해 들었고, 그날 책상에 앉자마자 새 종이에 ‘페스트의 밤’이라는 제목 아래 자신이 들은 것들을 또박또박 썼다. 그들은 마지막 배가 항구를 떠났기 때문에 새로운 편지가 이스탄불에 있는 하티제 언니에게 금세 전달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파키제 술탄은 오스만제국의 마지막 파디샤 압둘하미트의 조카이다. 술탄, 파디샤, 파샤 이런 용어들은 각 지위에 붙은 호칭이다. 우리로 치면 공주, 왕, 대신 이런 식. 삼촌이 왕인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좌에 앉은 뒤 가족들은 궁전에 갇혀 살고 있었는데 파키제 술탄은 의사 누리와 결혼을 하고 페스트가 창궐한 중국에 무슬림들의 과격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향하는 배에 함께 태워진다. 중국으로 가던 길에 오스만제국의 방역을 담당하던 본코프스키를 만나게 되는데 페스트가 창궐한 민게르섬에 방역을 위해 비밀리에 배에 올랐다고 했다. 그런데 민게르섬에서 본코프스키는 갑작스럽게 살해 당하고, 파키제 술탄과 의사 누리는 민게르섬으로 가서 페스트 방역과 살인사건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게 된다. 그렇게 해서 파키제 술탄, 의사 누리,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콜아아스까지 세 명은 민게르섬으로 들어간다. 이 소설은 파키제 술탄이 언니 하티제 술탄에게 쓴 편지를 정리하면서 시작된다.

 

민게르섬에서는 페스트에 대항하기 위해 회의실에 지도를 그리고 페스트 사망자를 점찍으며 페스트의 경로를 추적하고 마을을 봉쇄한다. 부자들은 봉쇄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섬을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방역을 믿지 않는다. 환자가 나온 집의 가족들이나 접촉자는 감옥으로 쓰던 곳의 격리 장소에 격리하고 페스트 병상을 운영한다. 마을은 수시로 소독한다. 방역을 전담하는 군대도 조직된다. 헌신하던 의사가 죽기도 하고, 부적을 쓰던 셰이크도 죽는다. 도둑들이 환자의 감염된 물건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빈 집을 못 박지만 페스트 고아들이 살기 위해 물건을 훔친다. 그리고 사람들은 강제하면 반발한다.


민게르섬의 총독 사미 파샤는 처음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이 사실을 숨기고 싶었고 언론을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페스트는 숨긴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1665년 영국의 페스트 유행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와 비교했을 때 200년이 더 지난 시점이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작은 섬은 훨씬 더 방역이 어려운 처지였는데, 종교와 민족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코로나가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종교 문제가 불거져 나왔듯이 이 섬에서도 종교인들이 그들의 예배와 관습을 포기하려 하지 않아 방역관들과 갈등을 초래한다. 느슨한 불교 신자인 나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결국 이 섬에서는 무슬림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잡고 모든 방역을 해제하고 페스트 사망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결국 본인도 페스트로 죽고 난 이후에야 ‘방역이 중요한 것이었군요, 제발 방역하게 해 주세요’로 돌아가게 되는데 종교가 결국 인간의 욕심 아니고 무엇인가 싶었다. 

민게르섬이라는 작은 표본 안에서 감염병 시대의 힘의 이동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총독이 지휘를 하게 되고, 이후 방역관으로 바통이 넘어가지만 이 과정에서 종교와 외국 영사, 돈이 있는 자들의 힘이 끊임없이 개입한다. 군대가 만들어지자 군지휘관으로 힘이 옮겨가고, 페스트로 이 모든 권력이 망가지고 나서 다시 종교가 우뚝 선다. 종교마저 희망이 사라지자 다시 방역으로, 그리고 왕가의 혈통이 흩어진 민심을 모으는 역할을 한다. 페스트 방역에 성공하자 이 모든 역사 속에서 궂은일, 험한 일, 정보를 다루는 일을 하며 지휘자들을 뒷바라지하던 이인자가 이제 맨 앞에 서서 영광을 누리기 위해 앞으로 나선다.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반복하는 것이라는 말, 그 말이 생각난다. 
이 두꺼운 책을 읽다 보면 모든 상황에서 매 순간 속이 터지는데 그 모든 상황이 낯설지가 않다. 한 사람의 삶에서도 무수히 많은 우연과 필연이 엮이고 그 와중에 내가 하는 선택들은 옳고 그름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 사람들의 삶의 합이 역사가 되고 결국 알 수 없는 것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면 세상은 카오스가 맞구나 싶다. 결국 개개인이 자신이 행복한 것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회가 무엇을 보장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페스트라는, 혹은 코로나라는 국가적인 재난 상황에서도 결국 개인의 안위는 개인이 찾아야 했다. 물론 국가가 커져서 코로나라는 상황을 통제하고 우리의 삶도 통제했지만, 그것을 위해 우리가 희생한 것들도 잘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포스트 코로나를 생각해볼 때, 이 책의 포스트 페스트를 바라보면서 정치적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합당한 것일지,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희생을 치르지 않는지 눈을 크게 떠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정말 존경스럽다. 긍정적인 사람이 역사를 새로 쓴다. 긍정의 힘을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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