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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그거 얼만가요?

[파과] 65세, 현역, 여성, 킬러의 삶

by 신난생강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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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국내도서
저자 : 구병모
출판 : 위즈덤하우스 20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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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조합이다. 65세, 현역, 여성, 킬러라는 조합. 

그 65세의 현역 여성 킬러는 조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약 40년 간을 킬러의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의외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그 재능을 알아본 류에 의해 본격적인 킬러로 성장한다. 그들은 그 일을 '방역'이라고 한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만한 평범함으로 가장한 외로운 그녀의 삶에도 가족, 류와 조, 방역일, 무용, 강박사, 투우 등의 길고 짧은 인연이 얽혀 조각 조각 겹쳐있다. 

 

첫 장면이 좋았다.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은 임신부에게 시비거는 중년 남자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시작한다. 방역이라는 말이 청부살인과 조금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장면도 좋았다. 마지막 승부에서 왼손만 잃고 살아남은 조각이 네일샵에서 오른쪽 손톱만 꾸미고 나와서 손을 들어올려 보면서 상실에 대해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멋지고 나른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 노인의 서사는 좀처럼 보기 힘든데, 뜬금없는 주인공 설정이 참 재미있었다. 모든 묘사가 섬세하고 그 섬세함이 킬러라는 조각의 직업적인, 혹은 짝사랑의 조심스러움과 호흡이 맞았다. 반면, 킬러로서의 냉정하고 정확하고 과격하기도 한 일에 대해서는 몹시 담백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대비되어 나도 모르게 이 멋진 언니에게 빠져든다. 따뜻한 마음이 드는 것을 자꾸 늙어서 그렇다고 변명하는데, 이 따뜻함이 느껴져 '방역'이 악당을 무찌르는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여성의 다양한 미래를 보여주는 소설이라 더 좋다.(킬러가 되리라는 건 아니지만 😂)

 


조각은 주인 여자가 내민 손을 부끄럽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귤을 받아 껍질을 벗긴다. 말랑말랑한 감촉으로 봐서 그리 시지 않을 줄이야 알았지만 입에 넣으니 주인 여자의 말 이상이다. 혀에 감긴 귤 알맹이가 부서지자 입안이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감각으로 채워지고, 세로토닌이 한껏 상승한 상태에서 조모와 손녀를 바라보니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스럽다. 나름의 아픔이 있지만 정신적 사회적으로 양지바른 곳의 사람들. 이끼류 같은 건 돋아날 드팀새도 없이 확고부동한 햇발 아래 뿌리내린 사람들을 응시하는 행위가 좋다.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언감생심이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에 속한 인간이 된 듯한 감각을 누릴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 조손이 담긴 화폭을 바라보며 당치 않은 행복을 대체 추구하는 심리가 사실은 당치 않은 강 박사를 향한 모종의 열망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노력임을 어렴풋이 안다. 갓 쪄낸 떡처럼 따뜻하고 말랑한 가정을 다만 곁눈질로 부러워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거듭 확인하기 위함이다. 설령 자신이 업자가 아닌 보통의 여인이라도. 


 

글이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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