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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그거 얼만가요?

비건이라 죄송해요

by 신난생강 2020.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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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모임이 있었다. 

"△▲씨가 채식을 하니까 먹을 수 있는 걸로 골라볼게. 청국장은 먹어요?"라고 며칠 전 선배님의 질문을 받았는데, 고마운 마음 뒤에 죄송한 마음이 따라 들었다. 평소엔 잘 만나지 못하던 선배님이었는데 제가 채식을 해서요.... 라고 말한 이후에 자주 만나서 식사를 하게 되어 식사 자리마다 신경써서 메뉴를 골라주셨다.

 

사실 우리나라 식단에는 웬만해서는 채소가 빠지지 않기 때문에 어디든 가게 되면 먹을 수 있는 것을 먹겠다는 마음가짐이었지만, 일반 정식 메뉴라도 육수나 액젓, 다시다 같은 것들은 어디에 얼만큼 들어갔는지도 알 수 없고 골라낼 수도 없다. 지금껏 가장 큰 배신감을 안겨준 것은 야심차게 계란후라이를 걷어냈으나 돌솥비빔밥 바닥에 숨겨진 날치알을 발견했을 때였다. 어느 정도는 내려놓지 않으면 사회 생활하기 힘들고, 굳이 그렇게까지 집착을 할 이유도 없다. 오늘만해도 청국장에 멸치육수를 사용했을수도 있겠지만, 어른이 일부러 채식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아서 사주시는건데 그 마음만으로도 맛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바닥까지 싹싹 맛있게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그래도 "막창 고고"를 외치던 동기의 말에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새 메뉴를 골라야했다. 인사이동이 있은 후 한동안 이런저런 식사자리가 많아져서 자꾸 곤란한 상황에 부딪혔는데 비건에게 쉽지 않은 챌린지다.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시작한 비건 생활이었는데, 비건 식당은 흔치 않고 일반 식당엔 의외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없으며 나는 계속 일행에게 미안하고, 메뉴 선택부터 서로 계속 어렵다. 몰랐는데 이렇게 도처에 못 먹을 것들만 넘쳐나다니 놀라움의 연속이다.

 

아직 채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에서 각종 채소와 두부를 볶아먹고, 구워먹고, 쪄먹고, 쌈싸먹고 하는 것만으로도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고, 점심도 혼자 먹어야 하는 곳으로 발령이 나서 그냥 편하게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도시락 싸간다. 그래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데, 사람들을 만나 밥 한끼 먹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죄송한 일이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우리나라가 소수가 살기 힘든 나라라는 걸 비건이 된 후 느꼈고, 퓨전을 몹시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느 식당이든 채식 메뉴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더이상 비건이라 죄송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도 커피가 채식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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