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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그거 얼만가요?

비 오는 날 데이트 : 드라이브와 쳇 베이커

by 신난생강 202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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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것을 좋아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내 차를 가진 이후에야 비 오는 날을 좋아했으니 아직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비 오는 날 밖으로 나가도 더 이상 양말이 젖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다. 창 밖으로 비가 쏟아지지만 와이퍼로 쓸고 나면 환한 찰나의 시야를 얻을 수 있다는 안도감도 좋다. 무엇보다 타닥타닥 빗소리를 좋아한다. 내 차엔 블루투스가 잘 연결되지 않아 대개 음악 없이 그냥 다니는데 타닥타닥 빗소리를 들으며 운전을 하면 소리가 주는 즐거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비 오는 날 운전하는 것도 좋아한다. 한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비 소식을 들으면 없는 꼬리가 벌써 살랑거린다. 어제도 그랬다.

드디어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이 됐다. 반달씨가 들뜬 목소리고 비가 올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제야 불길을 잡겠다며 기뻐했다. 울진에서 불이 타는 내내 마음의 빚이 늘고 있었다. 반달씨는 비가 오면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우리는 비 오는 날 드라이브를 둘 다 좋아한다. 사실, 이번에 더 설렌 건 미나리 삼겹살을 먹을 거라는 얘기 때문이기도.

평소엔 노래를 일부러 찾아 듣지 않는다. 소리 없이 조용히 있는 것이 좋다. 최근에는 오전에 클래식FM을 들으며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긴 했지만, 방송 멘트에 방해를 받아 오래 듣지는 못한다. 음악만 있다면 좋겠다 싶지만 굳이 찾아서 배경음악을 깔지는 않는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은 또 다르다. 비 오는 날은 재즈다. 


https://youtu.be/3CRMypKlPTA

 


이번엔 쳇 베이커. 언젠가 유튜브 알고리즘에 걸려 듣게 된 쳇 베이커는 청량한 느낌의 재즈여서 좋았다. 요새는 딱 이 정도 감정의 무게감이 좋다. 빗소리 들으며 영화를 보려고 딱 맞는 영화를 아이패드에 다운 받았다. 산에 가면 와이파이가 안 될 수도 있으니까. 레이니데이 인 뉴욕. 위 링크로 삽입된 유튜브 제목이 '내리는 건 비가 아니라 쳇 베이커의 음악이었다'이고, 영화 속 개츠비가 부르는 Everything happens to me로 시작된다. 이게 비오기 전날 밤 데이트 준비였다. 역시 살랑살랑거린다.

드디어 비가 오는 일요일 오전.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올랐다. 반달씨는 운전을 잘하고 운전하는 걸 좋아한다. 낮에도 밤에도, 비가 오고 눈이 와도, 낯선 곳에서도 잘하고 좋아한다. 이건 애인으로서 아주 근사한 능력 하나를 보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블스에 타면 나는 내 전용 담요를 덮고 신나게 놀다가 잔다. 블스는 반달씨 차 이름인데, 내 동료 쌤의 차 이름이 푸마(푸른 마티즈)인 것을 듣고 너무 환상적이어서 반달씨에게 얘기해줬더니 반달씨가 신나게 따라서 이름을 지었다. 나는 대충 불스라고 부른다. 쳇 베이커를 틀고 빗 속을 달렸다. 비가 많이 내렸다. 완벽했다.

목적지는 밀양 단장. 적당히 멀고 가는 길은 달리기 좋고 온통 산이다. 코로나 이후로 단장면 조용하던 시골 마을엔 온갖 것들이 생겼다. 예전엔 메밀국수나 먹고 단장면 로스터스에서 커피랑 티라미수나 먹었는데, 이젠 온통 식당이고 근사한 카페다. 그리고 단장엔 재약산 미나리가 있다. 붐비는 청도나 원동보다 우리는 여기를 좋아해 봄이면 이곳으로 온다. 미나리 삼겹살집들도 깨끗하고 큰 곳이 많이 생겼다. 이번엔 새로 생긴 깨끗한 곳으로 가보았다. 둘이서 삼겹살 5인분에 미나리 한 단, 된장찌개에 밥도 한 공기씩 먹었다. 미나리가 깨끗하게 손질되었고, 곁들여 나온 고추장아찌가 아주 맛있었다. 반달씨는 그 구역의 미나리 삼겹살집을 다 섭렵한 후에 최후의 한 곳을 추려내겠다고 다짐했지만 내년이면 분명 또 수많은 식당들 사이에서 헤맬 것이다. 배부르게 먹고, 조용한 저수지 가에 차를 대고 아이패드에 쿠팡플레이 다운로드로 담아온 영화 레이니데이 인 뉴욕을 봤다. 비는 잦아들었고, 영화는 잔잔한듯 진부한 이야기로 휩쓸려가고, 반달씨는 묘한 포즈로 잠이 들었다.

Time flies. (시간이 날아가죠)
Yes, unfortunately it flies coach. (네, 슬프게도 이코노미석으로)
What's that supposed to mean? (무슨 뜻이에요?)
It't not always a comfortable trip. (늘 편안한 여정만은 아니라구요)


자연스럽게 대화에 집중하게 된다. 특히 개츠비와 챈의 쿵작 맞는 대화 흐름이 좋았고, 개츠비 어머니의 고백을 담은 묵직한 목소리가 좋았다. 

기대했던 카페 데이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포기했지만, 오랜만에 내린 봄비를 충분히 즐긴 소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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