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 다니엘 디포
이런 제목으로 책을 내면 도대체 누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펼쳤다. 하긴 원제도 'A Journal of the Plague Year'라서 어쩔 도리가 없긴 하다. 어쨌든 그 누가 볼까 싶은 책을 알게 된 건, 읽고 있는 다른 책 「클라우스 슈밥의 위대한 리셋」에서 이 책을 언급한 것이 꽤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리셋」은 코로나19 이후의 사회 여러 분야의 리셋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과거 사회가 견뎌냈던 재난 속에서 유사점과 특징에 대해 고찰했다.
1665년, 마지막 흑사병으로 18개월 동안 런던 인구의 4분의 1이 목숨을 잃었을 때 소설가 대니얼 디포는 1722년 발간한 <흑사병 연대기 논문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거래는 멈췄고, 고용은 중단됐다. 가난한 사람들의 일과 빵이 끊겼다. 그리고 그들이 내는 울음소리가 너무나도 애처롭게 들렸다. 수천 명이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밀려났고, 길거리에서 죽음이 그들을 덮쳤다. 런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알리는 전령 역할 뿐이었다." 디포의 책에는 부자들이 어떻게 '죽음과 함께' 시골로 탈출했고,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흑사병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됐고, '돌팔이 의사와 사기꾼들'이 어떻게 엉터리 치료제를 팔았는지 보여주는, 오늘날 상황을 연상시키는 일화들로 가득하다.
코로나19도 이제 거리두기를 완화하는 이 시점에 갑자기 왜 이 글을 읽고 페스트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걸까? 역사 속에서 역병이 리세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떤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어떻게 변화를 이끌어낼 수밖에 없었는지를 찾아보고 싶었다. 또 하나는 대니얼 디포라는 작가가 쓴 책이라는 것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서 한글 번역본을 찾아두고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때마침 「The real Anthony Fauci: Bill Gates, Big Pharma, and the Global War on Democracy and Public Health」라는 책을 알게 된 이후 과거 감염병 전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먼저 공부하고나서 저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페스트의 밤」도 출간되었지 싶었고, 근데 아직 '그' 「페스트」도 안 봤는데 싶었고, 그렇게 역사가 진짜 반복되는 건가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길고 멍청한 페스트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 책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는 그 자체로 재미있는 책이다. 이 책의 지은이가 '런던에서 모든 것을 겪은 한 시민'으로 되어 있고, 책의 맨 마지막에는 'H.F.'라는 이니셜이 있어 처음에는 당연히 표지의 내용 그대로 1665년에 페스트가 런던을 휩쓸 당시 현장을 지켜본 사람이 남긴 기록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1780년에 진짜 저자가 다니엘 디포라는 주장이 나왔고 동시에 이 책의 장르가 소설인가 하는 논쟁이 일었다고 한다. 픽션이 아니라 역사에 가깝다는 결론이 난 것 같지만, 그리고 실제 읽어보면 소설이기엔 넘치게 디테일한데 진실이 무엇이든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한겨울이었다. 두 명이 한집에서 사망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페스트가 도심에서 부활하자 처음에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같은 집에서 또 한 명이 페스트로 사망했다. 페스트로 사망한 사람이 몇 개월 사이에 3명. 통계 상 그러하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같은 시기에 그 교구 내에서 반점열 같은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이 갑자기 몇 배로 늘었고 사망자 매장 건수도 확연히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알게 모르게 페스트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통계를 숨긴다는 문제제기부터 시작된다.
런던 시내에서 페스트가 퍼지기 시작하자 부자들은 시골로 피난을 떠난다. 영국 왕실도 예외 없다. 군대까지 이끌고 옥스퍼드로 떠났다.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미리 떠났고, 신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은 사람들과 가난해서 떠날 수 없는 사람들과 치안을 담당한 판사와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지킨 의사들, 돌팔이 치료사와 사기꾼들이 도시에 남았다. 이 글의 저자는 신이 자신을 보호해 페스트가 본인은 피해 갈 것이라고 하늘의 뜻을 받았다고 믿은 축이었다.
봉쇄가 시작됐다. 도시가 봉쇄되어 외부와 차단되었고, 환자가 생긴 집은 환자와 그 일가족 모두 집 안에 봉쇄되었다. 놀랍게도 1603년에 '전염병에 감염된 사람들을 자비롭게 구하고 치료하기 위한 법'이 제정되었고, 1665년 페스트 상황에서 그 법에 근거해 주택 봉쇄 및 시신의 빠른 매장 등 일련의 방역 활동이 진행되었다. 감염병의 보고부터 시작해서 어떤 사람들이 얼마를 받고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환자와 동거 가족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죽은 자를 어떻게 매장하고, 감염된 물건을 유통 금지시키는 것, 감염된 집에 대한 감시, 도로의 청결 유지와 걸인 관리, 놀이와 축제를 금지, 밤 9시 이후 술집과 커피집 영업 제한 등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도시 내에 돼지, 개, 고양이 등 동물들을 모두 죽여 없앤 것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페스트는 처음에 도시 외곽의 주로 인구가 밀집된 가난한 사람들을 덮쳤고 서서히 성 안쪽으로 넘어왔는데, 그래서 자신들은 페스트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여겼던 성 안쪽 부유한 지역은 페스트가 덮쳐왔을 때 무방비로 당했다.
또 페스트의 감염경로로 꼽은 것이 '하인'이라는 게 인상적이었다. 페스트를 두려워해서 초반부터 물자를 충분히 사재기하여 집 안에 스스로를 봉쇄시킨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그런데 방심했던 사람들은 필요한 음식이나 물품을 사러 하인들이 들락날락했고, 이 하인들이 페스트를 온 집안에 퍼뜨렸다. 주택 봉쇄는 한 명의 환자만 생기면 모두가 집 안에 갇히는 것인데, 처음엔 환자가 아니었던 사람들도 집 안에서 옮아 일가족이 차례로 모두 죽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장들은 집 안에 환자가 생기면 알리기 전에 나머지 가족들을 피신시키고 신고를 했고, 이 나머지 가족들은 받아주는 이 없이 길을 떠돌다가 길에서 죽었다. 선량한 사람들이 떠도는 사람을 받아주었을 경우에도 비극은 일어났다. 페스트인 줄 모르고 있던 사람이 선량한 가족까지 모두 죽이는 사태가 빈번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것이 지옥인 시절이었다. 환자들은 통증을 참다못해 폭력으로 집을 탈출해 거리를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다 길에서 죽기도 했고, 고용된 간호사들이 물건을 훔치거나 환자를 몰래 죽이기도 했다는 소문도 있다. 체계적이고 잔인했던 봉쇄의 역사를 마주하니 유럽사람들이 코로나19 봉쇄 때 왜 그렇게 '공익'에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외쳤는지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페스트가 발생하면서 도시의 모든 산업활동과 무역이 중단되고 사람들이 시골로 빠져나가면서 대량 해고가 이어졌다. 여기서 또 특이했던 건, 부자들이 도망가면서 도시에 남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호금을 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페스트 기간 동안 빵 가격도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구호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고, 빵 공장을 쉬지 않고 돌리도록 했다. 환자가 늘어나면서 간호사와 감시원, 시체 처리인이 필요했고 일이 필요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일을 해서 생계를 이어갔다. 물론 빈집을 터는 도둑도 있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다툼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그만큼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거리를 깨끗하게 유지했고, 근본적으로 사회 체제가 흔들릴 만큼의 혼란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구호금과 런던 시장과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체계적인 업무수행 덕분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다시 이런 재난이 닥친다면 피난 갈 수 있다면 무조건 피하라고 제안한다. 특히 아이를 가졌거나 젖을 먹이는 여자들은 어떻게든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지역에 남는다면, 감염 초기에 충분히 물품을 비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대한 바깥 상황과 접촉을 줄이기 위해서다. 본인이 지역에 남아서 후회했던 두 가지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전체 사망자가 5만명이 넘어가고 한 주에 만 명씩 죽는 상황이 닥치자 시골로 떠나야 했는데, 물품을 충분히 비축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의 말이 터져나온다.
사람들은 통계 수치 상 사망자가 줄어들면 쉽게 경계를 풀고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그러면 또 사망자는 많아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페스트는 스스로 약해졌고 환자들은 어느새 나았다. 사람들이 무엇을 했기 때문에 상황이 좋아졌다기보다는 어떻게든 견뎌낸 사람들은 다시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수레 가득 쌓인 시체를 쏟아붓고 파묻은 구덩이를 파내고 그 위에 근사한 집을 지었다. 수많은 사람이 끔찍하게 희생되었지만, 누군가는 그것이 기회였고 부자가 되었다. 가짜 치료약을 팔던 돌팔이는 이미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 한해 전,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끌려간 불행 탓에 페스트를 피한 청년은 가족들이 모두 죽어 아무도 없는 빈집에 홀로 들어섰다. 역사는 그냥 그렇게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단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사라졌을 뿐. 잔인하지만 세상은 계속된다.
'▶ BO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68/1000] 설희 10 >> 타이밍 (0) | 2022.04.23 |
---|---|
[67/1000] SNS로 돈 벌기 >> 가치를 어떻게 만들어낼까 (0) | 2022.04.22 |
[65/1000] 설희9 >> 20대의 사랑 (0) | 2022.04.20 |
[64/1000] 너무 시끄러운 고독 (0) | 2022.04.16 |
[61-63/1000] 설희 6-8 >> 블랙박스 (0) | 2022.04.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