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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그거 얼만가요?

3000원의 행복, 코인 빨래방

by 신난생강 2022.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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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 빨래방을 종종 이용한다. 보통은 이불 빨래를 한 짐 가져가서 세탁과 건조를 하고 온다. 그러면 비용은 1만 2천 원 정도 들고, 한 시간 가량 소요된다. 그 시간 동안 앉아서 책을 읽는다. 집에서는 세탁기가 돌아가면 시끄러워서 뭘 해도 거슬리는데, 이상하게 빨래방에서 책을 읽는 건 집중이 잘 된다. 그래서 빨래방에 올 땐, 두꺼운 책, 잘 안 읽히는 책을 가져오는 편인데 이번에도 잘 안 읽히는 책.

지난번 동네에서 다니던 빨래방은 빨래방 체인이라 충전 카드를 이용했고 조금 더 저렴한 느낌이었다면, 요즘 가는 우리 집 근처 빨래방은 100% 동전을 사용하는 소규모 개인 업체이다. 반달씨와 나는 한때 남해에 반해서 은모래비치 앞에 이런 빨래방을 하나 차리고 사는 게 꿈이었는데😋… 그러니까 빨래방은 은모래비치 앞에서 하기를 꿈꿨던 수많은 사업 중에 하나였다. 사랑하면 꿈이 많이 생긴다. 대개 헛된 꿈으로 끝이 나지만. 이 상상 속의 은모래비치 앞 빨래방은 해변의 모래 때문에 잦은 고장을 일으켜 골치가 아픈 것까지 생각을 뻗고는 새드 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 집 앞 작은 빨래방에선 믹스 커피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직장인일 땐 흔하게 있어도 잘 안 먹던 믹스 커피가 이상하게 먹고 싶을 때가 있는데 여기서 믹스 커피의 상징 맥모골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따뜻하고 단 맥모골 한 모금과 웅장하게 울리는 윙윙 소리와 책. 나름 환상의 조합이다. 물론 체인점 빨래방에서도 커피, 과자 같은 것이 모두 자판기 안에 있었고 사 먹기도 했지만, '어서 오세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로 시작되는 기계적 환대의 첫 코스인 믹스 커피 한 잔 속의 한국인의 정, 거기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과 딱 같은 그 아는 맛이 주는 행복은 아주 다른 것이다. 무인 빨래방에서도 커피의 정을 느낄 수 있다니, 아니 무인 빨래방이라서 더 좋은 것.

아, 그런데 이번엔 왜 3천원의 행복이냐 하면 집에서 이미 세탁을 다 돌린 빨래를 들고 가서 건조만 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 본 건 처음인데, 평소보다 좀 빨래 양이 많아서 세탁기 가득 찼던 탈수를 마친 빨래를 바닥에 끌어내 놓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건조기를 돌려볼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고, 빨래방 건조기는 크니까 덮고 자던 얇은 이불도 탈탈 털어 건조기에 함께 넣어볼까 하고 가져갔다. 와, 침대에 까는 패드도 가져올 걸... 3천 원을 5백 원 동전으로 교환하고 건조기에 같이 돌리는 향기 나는 종이를 사는 데 5백 원을 사용, 나머지 2천5백 원을 건조기에 넣고 돌렸다. 500원 당 4분. 합이 20분.

20분 동안 책을 읽고, 뽀송하게 건조된 빨래를 차곡차곡 정리해서 집에 오니 행복한 기분이 몽글몽글 생겼다. 기분 좋은 수건과 이불. 은은한 꽃향기 잠옷과 티셔츠. 왜 진작 이 생각을 안 했지? 향기 종이도 한 장 남았고, 고온 건조로 돌리는 것도 뒤늦게 알았으니 다음엔 2천원만 있어도 이 행복을 쌓을 수 있을 거 같다. 비 오는 날에 한 번 가야지.
김혜수와 주지훈이 나왔던 명작 <하이에나>에서 근사한 빨래방에서 새벽에 처음 만나고 주지훈은 책을 읽고 있던  김혜수에게 반하지 않던가. 시골 동네 작은 빨래방엔 그런 종류의 로맨스는 없지만, 단돈 3천 원이 주는 일주일 치의 뽀송함과 맥모골이 있으니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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