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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그거 얼만가요?

카페와 책

by 신난생강 2022.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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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피 한 잔과 책만 있으면 다른 호사가 부럽지 않다. 다행히 적은 돈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책 읽기 편안한 환경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그리고 책. 커피가 맛있다면 금상첨화.
집 주변에 책 한 권 들고 천천히 걸어서 갈만한 괜찮은 카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세권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우리 집 근처에 스타벅스보다 훨씬 맛있는 커피를 파는 괜찮은 카페가 있는데 대신 한정된 공간에 주인이 직접 자리하고 있으니 스타벅스만큼 편안하고 느긋하게 책을 읽는 건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괜히 조금 불편하다. 스타벅스의 최대 장점은 카카오톡에 쌓여 있는 기프티콘을 쓸 수 있다는 것과 눈치 1도 보지 않고 카페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 아니겠는가. 20년을 드나든 편안함. 책을 읽는 데 최적화된 이상한 기류가 있다. 문제는 시골엔 스타벅스가 없으니까, 비스무리한 것을 찾아야 하는데 투썸은 묘하게 그 편안함을 비켜간단 말이지.

오늘은 내가 정한 ‘근사한 카페 탐방가기’의 날이라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 갔다. 규모가 꽤 크고, 강을 바라보는 탁 트인 뷰가 있어 블로그에도 꽤 많이 올라오는 핫한 카페다. 주말엔 복잡하지만 평일 낮이니까 그래도 한산한 느낌이었다. 야외에 햇빛을 가리는 텐트처럼 생긴 돔형 소파가 있어 거기서 소풍처럼 책을 읽다 오면 좋을 것 같았다. 지난주에 공원에서 책을 읽었는데 밖에서 책 읽기 딱 좋은 날이었거든.

야외 자리를 잡을 거니까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점심 대신 먹을 카라멜 스콘을 주문하고 카페를 한번 둘러봤다. 탁 트인 전망이 좋았다. 야외에 고양이 집과 냥이를 구경하고 있는데 진동벨이 울려 음료와 스콘을 픽업했고, 미리 생각해 둔 자리에 앉았다. 아늑한 자리에 야외라 조용했고 스피커 근처라 음악도 좋았다. 천천히 책을 읽다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늘 읽고 있는 책은 「광기와 우연의 역사」이다. 인류 역사를 바꾼 운명의 순간들이라는 부제의 슈테판 츠바이크가 지은 책이다. 괴테의 이야기에는 늙은 베르테르의 열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고, 74세의 괴테가 19세 소녀를 사랑해 구혼을 한 에피소드였다. 다행히도 구혼에 실패하고 절절한 이별의 감정을 <마리엔바트의 비가>라는 시로 표현했다 하는데, 호기심에 이 비가를 검색해서 보고만 나는 '이별의 키스' 어쩌고 하는 구절들을 읽다가 다시는 역겨운 괴테 따위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다짐했다.
법적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소유했으나 그 땅에서 금이 나와 거지가 된 남자의 이야기, 총살형을 받은 도스도옙스키가 사형대에서 풀려나는 순간까지 시처럼 쓰인 글, 대서양을 잇는 해저 케이블을 놓는 기적을 믿은 불굴의 사나이의 이야기를 차례로 읽었다. ‘하나의 기적이 혹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이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택한 야외의 자리는 이미 더웠다. 끔찍한 괴테를 겨우 읽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자리를 옮기자 카페 직원은 야외에 내가 앉았던 자리로 가 소독제를 칙칙 뿌리고 정리를 했다. 미안한 마음에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 와중에 내가 시킨 커피와 스콘은 맛이 별로다. 시원한 물을 가져와 두 컵이나 마셨다. 카페 안은 여러 테이블의 대화 소리가 섞여 소란스러웠다. 아가와 엄마가 와서 아가를 넋놓고 쳐다봤다. 햇볕이 강해지니 또 다른 직원이 와 내 자리 옆를 제외하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나 홀로 쏟아지는 햇빛 아래서 책을 읽었다. 이번엔 다른 직원이 내 자리 옆 화분에 물을 주러 왔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카페였다. 괜히 아직 거대하게 남은 스콘을 당당하게 바라봤다.

언젠가 한 곳에 자리잡고 싶어지면 북카페를 하는 게 꿈이다. 굳이 책을 판매하는 북카페는 아니고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는 북카페에서 소소한 문구류나 파는 거다. 매일 다른 종류의 책모임을 열어 함께 책을 읽는 공간. 내가 눈치 보지 않고 좋은 공간에서 마음껏 책을 읽기 위한 사심 가득한 북카페. 좋은 곳에서 좋은 것을 내어주고 느리게 책을 읽고, 느리게 사는 삶을 꿈꾸면서 적은 돈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맞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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